창설자이신 빌리암 폰 케틀러 주교님과 초대원장이신 마리 라 로쉬 수녀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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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8-09 10:21
[독후감] 마리 드라 로쉬를 읽고
 글쓴이 : homepi
조회 : 3,739  

마리 드라 로쉬를 읽고                        

                               진순옥 (마리아) 수련수녀


마리아 수녀님은 수도회의 공동창설자 이시며 초대원장이셨다.

그 사실 만으로도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내게 중요하게 이끌리는 부분이 되어 수녀님의 전기를 읽게 되었고, 하느님의 섭리의 체험을 다소 공감하고 신앙의 신비 또한 알게 되었다.


이글은 타르실라 수녀의 마리아 수녀님의 기록돌과 서한들을 검토하고 연구함으로써 쓰여 졌다. 마리아 수녀님의 서한들은 케틀러 주교님과의 서한들과 장상에게 그리고 사촌 오빠인 사제와 친척들 에게 보낸 편지와 답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서한들은 온화하고 고결한 마리아 수녀님의 성격과 정신을 보여 준다. 이 서한들 속에서 수녀님의 인내와 지혜 그리고 장상에게의 순명 하느님 깨로의 온전한 의탁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수녀님은 1812년 10월 28일에 태어나 1851년에 가톨릭으로 재종하기 까지 라호슈 슈타르겐펠스 스테파니 여 남작이었다. 개종 후 케틀러 주교님과의 만남은 수녀님께 수도회를 소개한 대신 창설 단계중인 수도회를 부탁받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깊이 생각한 후 주교의 청을 수락하였다. 개종만으로도 수녀님은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상속권을 박탈당해야 했으나, 동생 엠마도 세례 성사를 받게 되었다. 수녀님은 리부빌의 천주섭리 수녀회에서 양성을 위한 수련을 받고 휜튼 공동체에서 주교님께 첫 회헌을 수여 받았다. 1852년 11월 15일 천주
섭리 수녀회 초대 원장으로 임명 되었고 185년 6월 18일 휜튼 본당에서 케틀러주교에게 착복식을 하고 수도 서원을 한다. 40세의 나이에 수도생활의 첫 교육을 시작한 마리아 수녀님 그는 모든 인간적 희망과 욕구를 성취할 수 있는 귀족이었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였고 하느님께서는 낮은 자리로 인도하셨다.


‘ 마리아 ’ 는 케틀러 주교의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화니의 요청에 대한 천주섭리수녀회의 최초의 수녀에게 내린 이름이다. 리부빌의 수녀원은 헛간에서 시작되어 호텔건물의 개조등 어려움 속에서도 마리아 수녀님과 주교님과의 서한들은 하느님께 감사하며 성모님께 전구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교는 ‘ 회헌은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 라고 하며 수녀들에게 규범적인 준수를 강조하고 성서를 공부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고 수녀들은 회헌의 생활화를 열망하였다.
 

마리아 수녀님은 편안함을 멀리하고 춥고 허술한 방을 선택했고 수녀들은 새 원장 수녀의 소박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좋아했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이해심에 감동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라고 불렀다. 그의 명령은 명령이라기보다 겸손한 부탁과 같았기 때문에 순명하는 것이 별로 힘들게 여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약하거나 병상에 있는 수녀에게 다정한 어머니와 같았고 친절한 간호사였다. 자매들과의 관계 안에서 아우취신부와의 갈등은 시련을 통하여 수녀님에게 영성적 성장을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수녀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어 내어 그에게 모든 고통은 하느님의 은총을 얻어내는 은총의 수단으로 여겼다. 어린이의 단순함으로 하느님만을 섬기고 실천하며 겸손 되이 주교님의 뜻을 받아 들였다. 도보 순례 중 휜튼에서의 큰 화재가 있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수녀원만 남기고 모두 불탔지만 섭리의 손이 화염에서 보호해 주었다. 수녀님은 수녀들이 갈등과 좌절에 빠져 괴로워할 때마다 ‘ 가장 어두운 길이 사랑과 은총의 빛으로 인도해 줍니다. 어린이의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을 꼭 들어주실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더욱 숭고하고 더욱 착한 사람이 됩니다.’ 하고 격려하였다.


1855년 아우취 신부님과의 갈등으로 원장직을 박탈당하고 23살의 빈첸시아 수녀에게 원장직을 넘기고 주교의 뜻에 따라 헤른스하임으로 간다. 그에게 주교의 목소리는 곧 하느님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년이 조금 지난 후 1856년 8월 24일 노이슈타트 고아원을 개원 하게 되고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집은 성모님께 봉헌하였으므로 이름을 ‘ 성 마리아 고아원’ 이라고 하였다. 마리아 원장은 수녀들뿐 아니라 고아들에게도 그지없이 자애로운 어머니였으며 주교님께 보낸 서한에서는 지극한 겸손을 보여준다. 특히“ 기도 중에 느끼는 분심과 마음의 메마름은 저의 큰 고민거리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을 섬기고 이웃에게 헌신하는 일에서 진보가 다주 느립니다. 성모님과 다르게 저는 자주 주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 그는 대다수의 수도자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결점들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자책하기도 했다. 마리아 원장은 수녀들에게 말했다. ” 아이들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 라며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중하였다. 1857년 여름 어느 날, 장티푸스가 마리아 원장을 제외한 모든 수녀와 고아들을 덮쳤고 그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 자상한 간호사이며 어머니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제단 앞에 엎드려 쓰러지고 말았다. 염을 마친 수녀님의 시신에 옷을 입히려 할 때 적당한 옷을 고를 만한 충분한 옷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수녀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동시에 그들에게 청빈의 철저한 삶을 보여 주었다.


‘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겠다. ’는 마리아 원장의 꿈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마리아 수녀님의 나이 45세. 그는 노이슈타트에 학교와 고아원을 세웠다. “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 요한 15,13) 마리아 수녀님은 ‘ 희생의 삶이었다.’ 모든 일을 겸손과 순명으로 받아들이시는 수녀님의 모든 삶은 수도자로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사랑받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자세임을 보여준다.


마리아 수녀님은 끊임없이 기도 하셨다. 신앙은 우리의 유일한 버팀목이다. “ 하느님, 당신은 저의 인내이시고 힘이시며 저의 빛이시고 조언자이시나이다. ” 인간적 한계를 넘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에 하는 귀감을 보여주신 수녀님의 삶은 하느님 나라라 지금 여기에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다시는 온전히 나를 비우고 내어 놓아야 한다는 묵상과 희망을 주었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내 마음과 전신과 온 정성을 다해야 하고 실천하는 삶이 곧 진정한 수도자가 되는 것임을 알게 해 주셨다.


글로써 만나 마리 드라 로쉬 원장 수녀님과 그 만남에서 하나 되게 하여 주신 위로자 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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