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가을여행 1…피에타, 슬픔의 빚: 곽병찬의 향원익청
자료: 인터넷 한겨레 신문 2014-10-22, 일러스트 이림니키안산 가을여행 1…피에타, 슬픔의 빚
곽병찬의 향원익청
안산은 아름답다. 특히 그 속살과 서사는 더욱 아름답다. 멀리 아우라지 탄광에서 떠밀려온 이들이 마을부터 다시 세우는 이야기부터 동남아, 중앙아, 멀리 아프리카에서까지 꿈을 찾아온 이들의 슬픔과 기쁨, 꿈과 절망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죽은 아이 앞에서 비통해하는 어머니. 세상은 그런 아이의 희생 위에서, 그리고 아이를 먼저 보낸 어머니의 슬픔 위에서 조금씩 인간다워졌다.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피에타 상. 아우슈비츠, 팔레스타인, 난징, 히로시마처럼 안산도 피에타의 도시가 되었다.
“철학이 세상에서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일일 것이다. 존재의 근거라 할 그것은 지금의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타인에게 져야만 했던 슬픔의 빚이다.”(김상봉 교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안산은 아름답다. 특히 그 속살과 서사는 더욱 아름답다. 도시의 영고성쇠도 그러하거니와, 멀리 아우라지 탄광에서 떠밀려온 이들이 마을부터 다시 세우는 이야기부터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멀리 아프리카에서까지 꿈을 찾아온 이들의 슬픔과 기쁨, 꿈과 절망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개발의 칼날에 죽었다가 인간의 참회 속에서 살아나고 있는 시화호 또한 그렇고, 그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고 또 함께 울어준 시화호 갈대밭이 그렇다. 사람들은 안산 9경이라 하여 볼거리를 모아놓고 있지만, 그건 덤이다. 도시의 서사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소품이다.
이곳에 지고 있는 슬픔의 빚을 상기하기 위해 굳이 난해한 철학의 가르침에 기댈 필요는 없다. 만추의 거리를 거닐면 안다. 하늘에서, 바람에서, 천변에서, 가로수에서, 갈대밭에서 그 비극적 서사는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잿빛일 것만 같은 안산은 놀랍게도 캐나다에서도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 캘거리를 본떠 계획된 도시다. 비록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캘거리와 비교할 순 없지만, 공원과 숲과 호수는 그에 못지않다. 녹지가 70%에 이른다.
상징적인 장소가 화랑유원지이고, 그 한편에 거대한 피에타 군상이 있다.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처럼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안고 있는 안산의 어머니 아버지들, 형제자매와 친구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므로써 나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비극은 타인의 연민과 공포를 통해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을 정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정화를 말할 수 없다. 눈앞에서 애타게 부를 때 우리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버둥대는 손길을 누구 하나 잡아주지 못했다. 그저 지켜만 봤다. 카타르시스 문법은 적용될 수 없다.
혹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감상하러 로마로 가고,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을 찾아 베를린으로 간다. 그 앞에서 인류가 진 거창한 슬픔의 빚을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깊어지고 있는 슬픔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가식이고 감정적 사치일 뿐이다. 이제는 찾아오는 이도 많지 않다. 한때 한두 시간씩 줄지어 서 있다가 영정 앞에서 간단히 묵념하고 돌아나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많은 아이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한명씩 살펴보고, 그 이름을 호명하는데 아무런 시간적 제약이 없다. 그 속에서 내 안의 그리움과 슬픔을 모두 불러내도 막을 이 없다.
분향소 출구 쪽엔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위해 단원고에서 출발하면서부터 구명조끼를 입고, 기울어져가는 배 안에서 우리를 부르기까지, 아이들이 휴대전화에 남긴 사진들이 시간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밝고 맑음은 오래였고, 비극은 순간이었다. 분향소 외벽엔 세월호 추모만화전 ‘메모리’가 전시되고 있다. 작가들이 한편씩 마음에서 길어올린 하늘에서 온 편지가 유가족 텐트 주위를 두르고 있다. 영정 사진과 그림 속 아이들은 대부분 만추의 하늘처럼 맑고 밝고 붉다. 꿈도 재능도 저마다 색색이 아름답다.
분향소를 나오면 미술관, 그 뒤엔 널찍한 호수다. 도열한 느티나무가 저마다 다른 색깔로 물들고 있다. 화정천 옆 가로수엔 아이들 어깨너비의 노란 걸개가 하나씩 걸려 있다. “내 아이 다시 돌아온다면, 따듯한 밥 지어 함께 먹고 싶어요.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2학년 9반 보미의 아빠 엄마가 걸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아이 잃은 부모라면 어떨까,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지금 유가족이 얼마나 많이 인내하는지 알 거예요.” 침을 뱉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민경이 부모님의 마음이다. 2학년 7반 건호의 엄마와 아빠는 이런 소망을 적었다. “그들을 위해, 우리를 위해, 천개의 바람이 되어 주세요.” 만추의 안산을 물들이는 것은 단풍만이 아니다. 천개의 바람으로 나부끼는 노란 걸개가 하늘로 수학여행을 떠나버린 아이들을 배웅한다.
화랑교 옆엔 2학년 10반 김소희 학생의 소망이 있다. “잊지 말아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발….”
소희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친구들은 대부분 학교 인근의 와동, 고잔1동, 선부3동에 살았다. 살아서 돌아온 아이들은 등교하다가도 친구 집만 보이면, 정신없이 달려가 대문을 두들겼다. 이름을 부르다 철퍼덕 주저앉아 울었다. 그런 아이들이 광명체육관에서 하룻밤 묵었을 때의 일이다. 한밤중 갑자기 정전되자, 어른들은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이들은 겁에 질려 서로 부둥켜안고 떨고만 있었다. 단원고의 먼저 간 친구들 책상에 놓인 국화꽃은 시들지 않는다. 슬며시 찾아와 떨어트리고 간 눈물 때문이라고들 믿는다.
죽은 아이 앞에서 비통해하는 어머니. 세상은 그런 아이의 희생 위에서, 그리고 아이를 먼저 보낸 어머니의 슬픔 위에서 조금씩 인간다워졌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예수와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피에타 상, 서구인의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진 이 도상은 지금까지 다양한 변주로 탄생한다. 물론 그 속에서도 세상은 끊임없이 무죄한 이들의 희생을 요구했고, 그때마다 수많은 어머니들은 전 존재를 흔드는 슬픔에 빠져야 했다. 1, 2차 세계대전이 그랬고, 한국전이 그랬고, 베트남전 등이 그랬다. 9·11테러가 그랬고 지금의 세월호 참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루살렘, 아우슈비츠, 팔레스타인, 뉴욕, 사라예보, 난징, 히로시마처럼 안산도 피에타의 도시가 되었다.
케테 콜비츠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고 이런 말을 했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이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질려버렸다.” 지금 이 땅에선 가련한 이들 위에서 눈물 흘리는 신마저 조롱하고,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마저 희롱당한다.
화정4교를 지나면 오른쪽에 와동체육공원이 있다. 희망교회 김은호 목사는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초조하게 구조 소식을 기다리다 해가 저물자 그곳에서 촛불을 들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그가 컨테이너 박스로 지은 작은 도서관(와리마루) 앞에서였다. 이후 와리마루의 촛불은 아이들이 많이 살던 고잔1동, 와동, 선부3동으로 이어져 나갔다. 그 작은 마을 촛불집회에선 먼저 간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남아 있는 아이들을 위로하며, 준비해 온 다과를 나눈다.
공원을 끼고 주민센터 쪽으로 5분쯤 가다 보면, 길 건너 홍원빌딩 3층 오른쪽 유리창에 노란색 두 글자가 선명하다. ‘이웃’. 그 밑엔 보일락 말락 ‘치유공간’ 글씨도 붙어 있다. 이웃이 되려고 불원천리 찾아온 이들이 마련한 유가족들의 사랑방이다. 서울의 병원도, 양평의 집도 닫고, 아예 안산으로 이사를 해온 심리치유 전문가 정혜신 박사와 심리기획자 이명수 부부가 맨 먼저 달려왔다. 전국 각지에서 봉사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아왔다.
“유가족들은 집에서 밥 한 끼 지어 먹을 수 없어요. 자식을 그렇게 보내고 어떻게 따듯한 밥 지어 먹을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차라리 노숙하는 게 덜 아프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애들이 그 차가운 바닷속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그분들에게 따듯한 밥 한 그릇, 잠시 쉬어갈 따듯한 아랫목을 나누는 게 이웃입니다. 여기는 상담하고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고, 뜨개질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쉬는 그런 이웃 말입니다.”
그래, 보미의 엄마 아빠의 소망은 이랬다. “내 아이 돌아오면, 따듯한 밥 지어서 함께 먹고 싶어요.”
곽병찬 대기자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신의 아들이 되었다. 그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은 이 세상 어머니의 아픔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역시 평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안산의 어머니들은 아직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있고, 그 오열은 더 깊어지고 있다. 오, 피에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201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