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치료비 대신 나뭇가지를 내렴”
자료: 한겨레 신문 2012-1-1
새해특집 남수단에 꽃피는 희망한국인 신부 3명 오지마을 선교진료소 차리고 자활돕기에 열성절망하던 사람들 “고맙다” 연발
자기 키보다 큰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7살 사내아이 메룬은 창·칼·총·활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는 그림 경고판을 지나 진료소가 있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 250여만명을 죽인 내전이 2005년에 끝났지만, 가축을 뺏는 부족간 유혈 총격전이 여전한 곳이다. 군인들이 소 한 마리 값보다 조금 비싼 가격(1750파운드·약 52만원)에 총을 팔기도 한다.
메룬은 혼자 맨발로 한시간 넘게 걸어왔다. 12월에서 1월로 가는 아프리카의 한낮 태양은 수은주 눈금을 영상 40도 근처까지 쉽게 밀어올린다. 더러운 물을 마셔서인지, 배가 아프다는 메룬의 머리도 뜨겁게 익었다. 표창연(35) 신부는 “뱀한테 물린 어떤 아이는 20㎞ 넘는 거리를 비 맞고 온 적도 있다”고 했다. “그때 아이가 춥다며 떨어서 담요부터 덮어주고 안아줬다”고 한다. 이곳 아이들은 보통 한 끼로 하루를 버틴다. 지난해 2월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남수단 인구 절반인 470만명이 식량부족 상태라고 밝혔다.
메룬은 진료소 입구 노란 통에 나뭇가지를 넣었다. 이제 아이는 눈치보지 않고 약도 받고 주사도 맞을 수 있다. 말라리아 테스트에서 증세가 보이면 말라리아 약도 가져갈 수 있다. 치료비 대신 나뭇가지를 내라는 ‘착한 진료소’에 왔기 때문이다.
치료비 대신 나뭇가지를 들고 성당 진료소를 찾아온 아이들 모습.
이상협(33) 신부가 말했다. “돈을 받지 않지만, 길가에 흔한 나뭇가지라도 가져오는 노력을 해보라는 거지요.” 무턱대고 공짜로 도움받으려는 습성도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나뭇가지는 땔감용으로 모아둔다.
‘땅꾸유 할머니’가 표 신부를 찾아왔다. 아들이 타지로 나가 혼자 사는 할머니는 나무를 태운 숯을 자루에 담아 왔다. 신부는 답례로 옥수수 가루, 약간의 설탕, 빨랫비누 10개 값인 10파운드(3000원)를 건넸다. “땅꾸유!”
고맙다는 영어 ‘생큐’를 그렇게 발음해 땅꾸유 할머니로 불린다. “누가 도와주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겨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죠. 변화가 생긴 겁니다.”
아프리카 동북부 수단에서 지난해 7월 분리독립한 남수단공화국의 시골마을 아강그리알. 고 이태석 신부가 봉사한 남수단 톤즈가 그나마 비포장도로변의 큰 마을이라면, 수도 주바에서 420㎞ 떨어진 아강그리알은 좁은 숲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는 오지다. 이곳은 아랍계 북수단과 가톨릭·토착신앙을 믿는 남수단의 두 차례 내전 때 남수단 주민들이 숨어든 피난처였다. 녹슨 북수단 군용트럭 옆 흙집에서 사는 주민도 있다. 구호품에만 의지하던 긴급구호지였던 이곳에 자활의 기운이 조금씩 움트고 있다.
오지생활을 지원한 수원교구 소속의 30대 젊은 표창연·정지용·이상협 신부가 내전의 상처가 깊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만들어간 변화다. 신부들은 의료 지원, 장학금 후원, 주민들과 수수·땅콩 공동재배 등을 통해 이들의 자립을 돕는다. 표 신부는 “이곳 사람들의 의존증후군을 떨쳐내고 각자 삶의 비전을 세워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려 한다”고 했다. 정 신부는 “아직도 총을 들고 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매일 이곳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아침 미사 때마다 아이들·주민들과 함께 “증오와 좌절이 있는 곳에 평화와 (희망의) 빛을 뿌려달라”는 ‘평화의 기도’를 읊는다.
아강그리알(남수단)/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포연의 땅에 전한 일하는 기쁨…깨어난 아이들 “망쿠, 망쿠!”
정미소 차리고 수수밭 키우고 일자리 멍석깔아 학비 벌게해 이방인 열정에 아이들 맘 열어
남수단 아강그리알의 아이들은 맨발로 다니는 탓에 살이 찢어지거나, 전갈·뱀한테 물리기도 한다. 마시는 물이 깨끗하지 않아 복통 환자도 많고,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 고열을 앓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치료를 받으려고 한국 신부들이 지은 진료소 앞에 와 있다. 신부들이 돈 대신 나뭇가지를 내라고 해서,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왔다.
앞을 보지 못하는 피터(29)가 요란하게 푸드덕거리는 닭을 가슴에 품고 신부를 기다렸다. 닭을 팔러 온 것이다. 신부들은 누구의 닭이든 ‘제 값’(6000~7500원)을 잘 치러주어서다. 표창연 신부는 “(피터가) 가끔 병든 닭을 가져올 때도 있다”며 웃었다.
매일 아침 7시 올리는 미사가 끝나자, 아이들이 신부 뒤를 따른다. 누구는 걸어서 3~4시간 걸리는 쉐벳 마을의 큰 시장에 간다며 자전거를 빌렸고, 어떤 아이들은 성당 주변 풀 뽑기, 흰개미가 갉아먹은 대나무 울타리 정리 같은 일거리를 받았다.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를 일부러 만들어주는 거죠.” 표 신부는 “이렇게 5일 정도 일하면 1년 학비(50파운드·1만5000원)를 스스로 벌 수 있다”고 했다.
남수단 아강그리알의 젊은 한국인 신부들. 왼쪽부터 정지용·이상협·표창연 신부.
신부들은 정미소도 차렸다. 주식으로 먹는 수수가루 반죽을 만들려고 수수를 손으로 빻는 여성들의 가사노동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서다. 1파운드(300원)만 내면 분유통 3개를 채우는 수수가루를 만들어준다. 이상협 신부는 기름값을 겨우 충당하는 정도의 돈이라도 받는 이유를 얘기했다. “근처에 정미소가 또 있는데, 우리가 공짜로 해주면 그곳 운영에 차질을 주니까요.” 편의를 돕되, 현지 시장의 질서를 깨지 않으려는 것이다.
신부들은 축구 운동장만 한 밭에 수수도 키운다. 땅콩 심은 밭도 있다. 원주민 100~200명이 같이 일할 때 일당도 주지만, 공동 재배의 결실을 체험시키는 것이다. 수확물은 극빈자에게 일부 나눠주고, 마을잔치에 쓴다.
이들을 노동의 장으로 불러내는 게 순탄했던 건 아니다. “처음엔 ‘우릴 도와주러 온 거 아니냐’며 뭐든 받는 걸 권리처럼 여겨 부딪히기도 했으나, 전임 선배 신부들부터 주민들과 텃밭을 가꾸며 조금씩 변화시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신부들의 사옥공간에서 일하는 피터 공(33)은 “이곳 사람들도 어떤 대가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했다. 신부들이 만든 진료소에서 일손을 돕겠다고 나선 현지 학생들도 생겼다. 표 신부가 말했다. “아프리카 모든 곳이 긴급 구호지역은 아니지요. 이곳도 내전 피난민들이 모인 구호지역이었지만, 이제 재활의 시기로 접어든 곳이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은 겁니다.”
2012년 세밑에 찾아간 아프리카 남수단 아강그리알의 딘카부족 원주민들은 3명의 한국 신부들을 “아부나!”(신부 또는 아버지)라 부르며 따른다. 35살 동갑인 표창연·정지용 신부, 이상협(33) 신부는 아프리카에 파견된 한국 선교 사제들 중 가장 젊다. 남수단 룸벡교구 주교의 요청으로 2008년 수원교구의 한만삼 신부 등이 한국 신부로는 처음 이곳에 온 뒤, 이 30대 신부 세 사람이 이어서 생활하고 있다. 케냐에서 1년 반동안 영어연수와 아프리카 적응기를 거친 이후, 표창연·정지용 신부는 이곳에서 1년7개월, 이상협 신부는 7개월째 지내고 있다. 정 신부는 일주일의 5일은 주민 수가 늘어난 쉐벳 지역 성당에서 미사를 주례한다.
정글 숲 속 우기때는 늪지대로 진흙 밀려든 차에 갇혀 위기도 “아부나를 돕자” 아이들 우르르
이상협 신부가 ‘룹앙엣’이란 오지마을로 들어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신부들은 최근 컨테이너 진료소를 새로 지었다. 천막 밑에서 진료할 땐 소독하는 상처 부위로 모기·벌레들이 극성맞게 달려들었다. 신부들은 돈 없는 아이들을 위해, 길에서 쉽게 주울 수 있는 나뭇가지를 들고와 치료비 대신 내도록 한다. 돈을 받지 않지만, 나뭇가지라도 가지고 오는 노력을 해보라는 것이다.
정지용 신부가 한 아이를 떠올렸다. “빈손으로 온 아이가 있었어요. 처음 성당 진료소에 온 아이라, 나뭇가지 들고오는 것을 몰랐던 거죠. ‘다음에는 나뭇가지를 가져와야 해’라고 얘기해줬죠. 다음날 낮에 ‘이거 신부님 거예요’라며 한묶음을 내려놓더군요. 약속을 지킨 겁니다.”
한국에서 한 달 동안 응급치료 실습만 받은 이들은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파이고, 몸에서 피가 터질 만큼 맞았거나, 말라리아 고열 증세로 쓰러진” 위급한 상황의 아이들과도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의료 봉사자가 오면 큰 힘이 된다. 이상협 신부는 “이곳 아이들은 파스 한 장을 붙여주는 것보다, 물파스로 아픈 곳을 여러 번 발라주는 걸 좋아한다. 그만큼 관심과 사랑을 더 받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했다. 수원교구를 통해 선교후원금·물품을 받는 신부들은 올해에도 성당 옆 초등학교 학생 58명의 1년 학비와 33명의 교복비(1인당 1만500원)·고기 급식을 지원했다. 학교 울타리도 만들어줬다. 1년 생활비를 보태준 타 지역 상급학교 진학생 수도 15명이다.
12월24일 밤. 성탄 이브 미사가 열리자 교실 두 개 크기의 성당에 수백명이 가득찼다. 신부들은 한센병에 걸려 손가락이 뭉개진 두 모녀의 뭉툭한 손도 잡아주고, 두 다리를 쓸 수 없어 무릎으로 땅을 찍어 성당에 온 필립(29)과도 몸을 낮춰 눈을 맞춘다. 미사 직전엔, 성당 바깥 벽에 스크린을 걸어 영화 <벤허>도 상영했다. 주민들은 그간 영화 100여편을 봤다. 미사 도중 바닥에 빽빽히 앉은 아이들을 보며 이상협 신부가 말했다. “연약한 이 아이들이 희망이며, 평화의 상징입니다.” 이 말 끝에 주민들이 박수를 쳤다. 신부들은 자신들의 바이올린 합동연주를 아쉽게 접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연습했으나, 성당에서 시작된 주민들의 춤과 노래가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 밑 뜰까지 이어져 ‘고요한 밤’이 될 수 없는 축제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내전이 끝나 평온한 듯 보이지만, “한달 전에도 이쪽 부족과 톤즈 지역 부족들이 소를 뺏는 총격전을 벌여 수십명이 죽었다”고 한다. 차를 요동치게 하는 울퉁불퉁한 흙길에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지만, 표 신부는 “남수단에 갈 신부를 구할 때, 오지선교 갈망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고 했다. 가톨릭의 평등·정의·사랑의 가치관을 전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정 신부는 “한국에서 편히 살며 잊고 지낸 것들을 찾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글 숲 속 소로를 따라 아강그리알로 처음 들어오던 날, 표 신부는 “갑자기 막막해져 한숨까지 나왔다”고 했다. 그렇지만 “살다보니 여기가 내 집이 되더라”며 웃었다.
성당없는 곳 찾아가 미사·진료 오지 잇는 라디오 방송 열 계획“우린 연결고리…그들에게 배워”
아이들과 청년들을 태우고 룸벡 시내로 가던 중 트럭이 고장나, 청년·아이들이 차를 밀고 있다. 울퉁불퉁한 흙길인 남수단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4월엔 밤에도 30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벼락이 내리쳐 신부들이 사는 곳의 태양광 전기장치가 고장나 2주일이나 암흑에서 산 적도 있다. 비가 퍼붓는 우기엔 늪지대로 변한 곳에 차가 종종 빠져 소똥이 섞인 진흙이 밀려든 차 안에 갇혀 밤을 새우기도 했다. 표 신부는 동 틀 때까지 늪에 빠져 오도가도 못했던 어느 날의 갑작스러운 감동을 기억했다. “아이들이 ‘아부나(신부)를 도와야 한다’며 멀리서 달려왔어요. 네 군데 다른 길에서 지원군처럼 30~40명이 우르르 몰려나오는데 장관이었죠. 힘을 모아 10초 만에 차를 빼내더군요.”
신부들은 흙 먼지를 뒤집어쓰며 오토바이로 2~3시간 타고, 성당이 없는 곳도 찾아다닌다. 정 신부는 “어떤 곳에선 주민 한 명이 마을 사람들이 일주일 안에 모두 죽는 꿈을 꿨다며 마을 전체가 두려워해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때론 초원에서 길을 잃어 “늑대·하이에나 떼에 잡아먹히는 거 아닌가”란 불안에 휩싸인 적도 있지만, 신부들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나무 그늘에서 미사도 드리고, 약을 들고가 진료도 해주는 기쁨으로 오지를 방문한다.
젊은 신부들은 ‘기쁜 소식’ 하나를 더 검토하고 있다. 아강그리알과 인근 오지마을을 연결하는 라디오방송을 해보자는 아이디어다. 그러려면 에프엠(FM) 라디오 송출기와 이를 감당할 전기발전기를 갖춰야 한다. “우편배달이란 것도 없고, 전화기도 터지지 않는 곳이니, 라디오방송을 통해 지역 소식을 공유하고 교리학습과, 학생이나 학교에 가지 못한 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남수단 중심도로인 이 길은 웅덩이가 곳곳에 있는 비포장 흙길이다. 우기엔 진흙밭으로 변한다. 길을 가로막는 소떼와 대중교통 구실을 하는 오토바이가 남수단의 현재를 보여준다.
신부들은 “더러운 물을 마시고, 치료와 교육을 제때 받지 못하는 등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없는 살림에도 닭을 잡아 손님을 맞이하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즐겁게 살려는 이들한테서 우리가 잃은 것들을 다시 배우게 된다”고 했다.
이상협 신부는 “우리는 이곳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만능이 아니라, 연결 고리 같은 역할”이라고 말했다. “친구·형제처럼 더불어 살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들에게 삶의 비전도 심어주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신뢰가 쌓이면 교육·의료봉사자가 왔을 때, 우리가 주민들과 연결시켜줄 수 있는 고리가 될 수 있는 거죠.”
정 신부는 “처음엔 검은 얼굴색부터 보였지만, 지금은 각각의 얼굴 생김새가 보인다”고 했다. 그들의 본질을 오롯이 바라보게 된 것이다. 신부들은 “동정은 내가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만족하는 것이다. 그사람 처지에서 느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표 신부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편 뒤, “이곳에선 이게 숫자 ‘0’을 가리키고, 주먹을 쥔 게 숫자 5를 뜻한다”고 했다. “상대를 이해하고, 그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나눌 때 진정한 나눔이며 사랑이지요.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사람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
이곳 아이들은 표 신부가 자주 쓰는 딘카어를 거꾸로 흉내내곤 한다.
“망쿠! 망쿠!”
‘우리 박수를 치자’고 북돋우는 말이다. 낯선 이방인 기자에게, 꼬마들도 손을 먼저 내밀어 인사하고, 동네 개마저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것을 보며, 신부들이 뿌린 긍정의 기운이 강아지들한테까지 퍼진 게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글·사진 아강그리알(남수단)/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2013.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