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수도자 시국미사 강론 - 박 동호 신부
2012년 1월 31일(화요일)
해군기지 건설과 신앙
평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가져온 사랑과 정의의 열매이다.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길이다.
1) 예수님께서 세상에 펼치신 것은 사랑과 정의였으며, 사랑의 열매이며 정의의 결실이 곧 평화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건넨 첫 선물이 ‘평화’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곳에는 못 박힌 상처, 창에 찔린 상처가 있다.
피고름이 났을 것이며, 악취가 났을 것이다.
코를 막고, 눈을 감아야만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건넨 ‘평화의 인사’ 목소리는 결코 달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극단의 고통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악취와 처참한 모습과 고통의 신음으로 내 놓은 평화!
정의의 결실이며 사랑의 열매였다.
결실을 맺기 위해 온 몸을 다 바친 예수님이셨기에, 참 평화를 건네실 수 있었다.
이 평화는 죽음을 가져온 십자가에서 맺은 열매이다.
이 사랑은 아들이 매달린 십자가에서 맺은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지이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열매를 맺었으며,
인류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십자가에서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폭력적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평화에 대한 예수님의 비폭력 저항이었다.
예수님의 평화는 십자가 죽음으로 거둔 사랑과 정의의 결실이었다.
2) 우리는 미사 때,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 분께서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를 노래한다.
하느님의 영광과 땅의 평화는 서로 없어서는 온전할 수 없는 한 짝이다.
하느님의 영광이 없는 땅의 평화, 세상의 평화가 없는 하느님의 영광은
관념에 불과하며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의 신앙 행위의 절정인 미사는
이렇게 하느님의 영광과 세상의 평화를 갈망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미사의 절정인 성찬의 전례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건네주셨음을 환기한다.
그리고 미사를 마치며 파견할 때,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눕시다’며 다짐한다.
성체성사는 나눔과 희생과 감사의 제사이며, 주님의 평화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성체성사는 평화의 실현이며, 동시에 주임의 평화에 대한 초대이며 참여의 성사다.
그것이 정당방위의 방어 전쟁이든, 침략전쟁이든 전쟁을 전제하는 해군기지,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도입과 육군의 공격형 헬리콥터 도입, 이 모든 무력 군비 증강은, 우리가 신앙하고 고백하는 ‘평화’에 정면으로 반한다.(사실 어느 전쟁도 당사국 스스로 침략전쟁이라 한 적 없다. 다만 승전국은 정당한 전쟁(just war)을, 패전국은 침략전쟁을 치렀을 뿐이다. 무력침략과 무력 사용의 정당방위는 승전국이 정했을 뿐이다.)
3) 해군기지 건설은 평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도 반한다.
십계명 가운데, 5계명은 ‘살인하지 못한다.’는 평화를 가르치며, 전쟁을 단죄하고, 군비축소를 강력하게 명령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군비증강(안보와 국방의 명분을 내세우지만)에 침묵하는 것은 계명을 어길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평화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밝히며, 그리고 군비경쟁에 대해서는 (다른 가르침의 경우 특정 ‘조건’을 부여하며 제시하지만) 주저함 없이 단죄한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오로지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로 전락될 수도 없고, 전제적 지배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올바로 또 정확히 말하면, 평화는 ‘정의의 작품’이다.... 또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사회 질서의 열매가 바로 평화이다. ... 이렇게 평화는 정의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는 사랑의 열매도 된다.”(사목헌장 78항)
“군비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신무기의 군비에 엄청난 재화를 소모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늘날 전 세계의 수많은 불행에 대한 충분한 해결책이 마련될 수 없다....
그러므로 거듭 선언하여야 한다.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이 경쟁이 계속된다면 가공할 온갖 재앙을 언젠가는 일으키고 말리라는 것을 몹시 두려워해야 한다.
분쟁을 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노력을 거부한다면, 스스로 들어선 이 악의 길에서 우리는 어디로 끌려갈지 모른다.”(사목헌장 81항)
‘극심한 역병’, ‘견딜 수 없는 상처’, ‘몹시 두려워해야 한다’, ‘악의 길’ 같은 표현을 공의회의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 ‘악의 길’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
3) 사회교리는 연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대성은 진정한 도덕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연대성은 가깝든 멀든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서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인 근심을 느끼는 무엇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도 항구적인 결의이다.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만인의 선익과 각 개인의 선익에 투신함을 뜻한다. 연대성은 정의의 영역 안에 자리하므로 근본적인 사회적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공동선을 지향하는 덕목이고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고 복음의 뜻 그대로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을 각오로 임하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억압하는 대신에 그를 섬기는 것이다.”(사회교리 193항)
4) 국방의 관점에서, 안보의 관점에서, 국제 정세의 관점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충분한 검토와 다양한 견해의 자유로운 참여가 보장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그 자체 역시 부적절하다. 그리스도인이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며 명료하다. 우리의 신앙과 윤리와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평화’의 길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201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