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과 영성
자료출처: 가툴릭 뉴스 지금 여기에, 2011-7-18, 사진: 인터넷에서
사회운동과 영성
[하나되어 다시 읽기-4]
이글은 1988년 6월 17일 종교와 문화, 그리고 인간발전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세미나 참석차 한국에 방문한 스리랑카의 알로이스 피어리스 신부의 강연을 발췌한 것입니다. 피어리스 신부는 저명한 아시아신학자로서 특히 교회의 사회적 영성, 아시아인의 고유한 영성을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새롭게 정리해 가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부님의 저서는 <아시아의 해방신학>(분도출판사) 등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편집자
요즘,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영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되는데, 이것은 사회운동과 영성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영성에는 묵상, 사회운동, 전례 등 세가지 측면이 있다. 묵상은 개인적 영성이며, 전례는 성사적 영성이다. 사회운동은 개인과 공동체의 요소가 복합되어 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파스카의 신비를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파스카의 신비란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 속에 오늘날 현존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는 마지막날에 신앙과 전례생활을 묻지 않는다중세의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진정한 구원은 성사적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라고 말한다.
즉, 예수는 이 세상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심판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비가 현존하는 장소는 이 현실이다. 즉 파스카의 신비가 현존하는 곳은 현실이며, 이 현실속에서만 진정한 의미의 성체성사의 현존이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파스카의 신비는 아래 <그림 1>의 (1)번 항목, 즉 묵상과 기도를 통한 개인의 신앙의 내재화와 (3)번 항목, 즉 성사와 전례적 행위를 통한 교회공동체의 축제가 복합되어서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신앙이 결여된 사회운동은 동기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참다운 그리스도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실천을 하고 난 후에 우리는 반드시 성찰을 해야만 한다.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해 나가는 축제가 없다면, 교회는 파스카의 신비를 구현해주는 장이 되지 못한다.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매우 열심히 일을 하다가도 문제에 직면해서 좌절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축제를 통해서 희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득하며 실현해 나간다. 따라서 개인적 신앙과 전례적 축제는 바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현실 속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실 질문은 신앙이나 전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 영성의 3가지 측면 중 어느 한 부분만을, 혹은 두 부분만을 지닐 수도 있고 세 부분을 모두 지닐 수도 있다. 그림으로 나타내어 보면 다음과 같다.
▲ 그림1 (1)번의 영성은 묵상과 기도만 할 뿐 파스카의 신비가 구현되는 현실속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는자들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일본의 선불교나 인도의 아쉬람과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2)번 영성은 전례에만 관심을 쏟는다. 역시 현실은 무시한다.
(3)번 영성은 개인의 신앙과 전례적 축제를 도외시한 채 사회활동에만 전념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영웅주의에 빠지기도 하며 희망을 잃은 채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이 세가지 그룹 모두 일종의 심리적 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 정신의 두가지 측면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4)번 영성은 개인적 신앙생활과 전례행위 두 가지에 몰두하며 교회 전통적으로 베네딕도회가 이 부류에 속한다. 베네딕도회의 영성은 전례를 통한 개인의 성화(聖化)이다.
(5)번 영성은 개인적 신심과 사회적 투신이 합치된 것으로 예수회의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6)번 영성은 활동과 전례를 복합한 것으로 라틴아메리카의 교회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이 세가지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 없으며 나름대로 전통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이상적이며 가장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7)번이라 할 수 있다.
베네딕도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바티칸은 전례가 영성의 시작이며 끝이다 라는 관점을 지닌다. 하지만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인 사도 바오로의 생각과는 좀 다른 점이 있다.
참된 영성은 고난 속에서 스스로 내어주는 삶
바오로 사도는 세례성사란 오늘날 사회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성체성사란 단순히 빵을 자르고 “이것이 내몸이다”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속에서 스스로 몸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로마교황청이 전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진정한 영성은 세상에서 고난 받으며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영성을 어떻게 체득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하여 스리랑카의 한 공동체를 소개해 보겠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및 마르크스주의자 등 다양한 인적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때로는 목숨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노동자의 권리와 해방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파스카의 신비를 실현한다.
이들은 매일 아침 불교도 스승의 인도로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들의 사회활동에 대한 성찰을 한다. 이 시간의 주요목적은 사회활동에 투신하는 것이 노동자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이냐를 성찰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말로는 억압받는 자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결국은 우리자신을 위해서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활동에 있어서 한 중요한 측면은 분별력을 지니는 일이다. 사도 바오로와 요한도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한 바 있다. 인간은 이성에 의존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정당화, 합리화시키는 특별한 기능을 지닌 이 이성에 속아버리기 쉽다.
이 공동체는 “노동자인 그리스도의 성체성사”라고 불리는 축제를 매년 정기적으로 갖는다. 이 행사를 거행할 때, 기도는 불교인이 하며, 음악은 마르크스주의 불교도인이 맡는다. 불교문화가 그리스도교에 토착화 된 것이 보여진다.
노동절인 5월1일에 열리는 이 장엄전례에는 노동자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길고도 아름다운 기도문을 음악에 맞추어 거리를 행진하면서 부르는 순서가 있는데, 이 때 기도문이 담긴 리플렛을 나누어주며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강론시간에는 성경을 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직접 준비한 연극이 삽입되는데, 1년 동안 일어난 주요 사회문제를 다룬다. 내용이 실제 삶과 직접 밀착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보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축제는 파스카의 신비가 오늘날 노동자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즉, 예수 그리스도가 노동자를 통해 어떻게 살며 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이 세상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속에 그리스도가 새롭게 부활한다는 점을 밝혀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형태로, 그러나 작은 규모로 매주일 전례를 행함으로써 묵상과 전례의 영성이 사회활동 속에서 상호보완 되면서 진정한 영성을 노동자들이 구현해 나갈 수 있도록 한다. <질의응답>
문/ 신부님께서 영성의 3가지 측면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평소에 교회에서는 죽은 미사 밖에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전례의 차원없이도 기도하며 말씀을 삶속에서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례’라는 부분이 꼭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답/ 미사가 생명력이 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파스카의 신비를 살지 않고 단지 전례의 형식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제는 끊임없이 세상속에 들어가 파스카의 신비를 실현시키면서 전례의 참의미가 드러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문/ 토착화를 시도 할 때, 교회로부터 제재를 받을 때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그럴 경우엔 오히려 신자 여러분들이 사제를 교육 시켜야 합니다.
문/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답/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즉 파스카의 신비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파스카의 신비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16~17세기 경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지배적 이었습니다.
▲ 그림2첫째, <그림2>의 (1)은 교회와 하느님나라를 동일시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계시며 그리스도 밖에서는 구원이 없으므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둘째, <그림2>의 (2)는 그림에서 보이는 겹쳐지는 부분, 즉 문화는 수용 할 수 있으나 다른 종교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19세기부터는 파스카의 신비가 교회에 의해 규정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교, 힌두교 등을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와 만나며 다른 종교에도 파스카의 신비가 있다는 이 견해는 로마교황청에서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 알로이스 피어리스, <아시아의 해방신학>, 분도출판사
이점에 대한 저의 견해는 제가 집필 한 책 <아시아의 해방신학>의 12장에 담겨있습니다. 그 주요골자는 파스카의 신비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곳, 진실을 추구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으며, 하느님나라의 구현에 투신하는 모든 종교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노력들 중에 그리스도교가 포함될 수 있는 일이며, 만약 파스카의 신비에 장애가 된다면 그리스도교 역시 이교(異敎)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지, 교회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파스카의 신비 밖에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으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가난한 이가 된다는 것이 왜 같은 뜻입니까? 답/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가난한 자를 위하여, 그리고 맘몬에 반대하여 투쟁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전 생애를 가난하게, 가난한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며 사셨습니 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하느님과 가까워지려면 가난을 택하여 가난해지거나, 가난한 자를 위해 투쟁해야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재물을 많이 소유한 채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IMF(국제통화기금)나 세계은행과 같이 잘사는 나라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 기구나 다름없게 됩니다.
<출처/하나되어 1988년 9월호>
2011.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