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 [1] - 강우일 주교
자료: 경향잡지 7월호, 사진: 민주의 소리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
1. 교회의 존재 이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이어받아 추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구원이란 정신적, 영적인 구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인간 전체에 대한 구원입니다. 구원이 정신적, 영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인 ‘강생의 신비’는 인간과 그의 세상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구원을 전제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Doctrina Socialis)는 구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구원은 의인들이 죽은 다음에 얻는 새 생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경제와 노동, 기술과 커뮤니케이션, 사회와 정치, 국제 공동체, 문화와 민족 간의 관계와 같은 실재를 통하여 이 세상에도 현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구원, 곧 인간 전체와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는 구원을 가져다주러 오셨습니다.’”(「교회의 선교사명」, 11항; 「간추린 사회교리」 1항)
그래서 “교회는 현세 사물에도 구원과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복음을 쉬지 않고 선포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2항)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요한 3, 16).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구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땅 끝에 이르기까지 파견하시고 ‘가서 모든 민족을 내 제자로 만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사랑의 새 계명은 이 세상에 현존하는 온 인류 가족을 포함하며 한계가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교회가 이어받은 예수님의 사랑이 개인적인 사랑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교회의 사회교리의 핵심입니다. 이 교리가 제시하는 모든 책임과 의무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체의 종합이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 36-40 참조) ‘사랑은 인간이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맺는 인격적 관계의 참된 본질입니다.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이 됩니다.’”(「진리 안의 사랑」 2항)
“사랑은 광범한 분야의 활동과 마주하며, 교회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간 전체에 관한 사회 교리를 통하여 인류에게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수많은 가난한 형제자매들은 도움을, 수많은 억압받는 이들이 정의를, 수많은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수많은 민족들이 존중을 고대하고 있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항)
그리스도교의 계시의 출발점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 높은 곳에 좌정하고 계신 추상적인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에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다가오시며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울부짖는 이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고통을 속속들이 아시고, 그들을 그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그곳으로 파견하시는 분’이십니다.(탈출 3, 7-15 참조)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찾아오시어 개입하시고 정의로 구원을 실현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속의 구체적인 인간살이와 무관하고 초월적인 절대자 하느님이란 인간이 자기 이성이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철학적 또는 신화적인 神이지 계시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살아계신 하느님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과는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고 초연하게 산야에 묻혀서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면서, 그 시대의 세상이 차별하고 억압하고 외면하였던 보잘것없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 몸으로 느끼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 분입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탐욕과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지고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정의로운 세상으로, 압제자의 왕국에서 ‘하느님의 왕국’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며 도전하시다가 반대자들의 음모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내 개인의 마음의 평화,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에 포함된 불의와 고통, 슬픔과 연민, 다툼과 평화를 다 함께 끌어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함께 고민하고, 예수님과 함께 참된 의를 실천하고, 예수님과 함께 연민과 수난의 길을 걷는 고달픈 여정입니다. 물론 그 고달픈 여정을 걸으면서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에 신뢰하며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심으로써 세상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참 평화를 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사실 거저 얻어진 평화가 아니라 수난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신 다음에야 얻으신 평화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영육으로 안락하거나 편안한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만은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피곤하고 고달픈 삶을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의 현실이 과연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야할 올바른 길에 부합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도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피곤함과 도전을 마다하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생각이나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는 인생 ‘동아리’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수많은 종교 단체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진실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을 향하여 폭넓은 시야와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의 가장 구석진 곳, 잊혀 진 사람들까지 관심과 연민으로 다가가시고 그들을 보살피고 치유하는데 모든 노력과 시간을 쏟으셨던 것처럼 그분의 제자 공동체도 서로 서로 이런 삶을 살기 위하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된 모든 이는 세상을 향하여 세심한 관심과 배려와 연민으로 다가가고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비록 오염되고 타락하고 폭력의 도가니라고 해도 이를 도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한복판에서 씨름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태생적으로 처음부터 세상 속에서 사회적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2010.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