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수녀회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필립 2,5)
(필립 2,5)
빌헬름 엠마누엘 폰 케틀러는 1811년 12월 25일 뮌스터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케틀러는 괴팅겐대학교 등에서 법과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1833년 뮌스터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군복무를 마친 후 1835년 정부의 서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1837년 11월 20일 1)쾰른(Köln)사건을 계기로, 프로이센 정부에 환멸을 느껴 1838년 5월 26일 공직을 사퇴했다. 이후 케틀러는 사제성소에 뜻을 두고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1844년 6월 1일 사제로 수품되었다.
그는 몇 년간 본당 사제로 사목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확장하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돌보았다.
당시 독일은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었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카를 마르크스 등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주창하는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다.
이 당시 노동문제는 교회가 당면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케틀러 신부는 1848년 10월 ‘교회의 자유와 사회적 의무’에 대한 연설, 같은 해 11월과 12월, ‘현시대의 중대한 사회문제들’에 관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강론했다.
케틀러 신부의 연설과 강론은 교회 안팎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1850년 7월 25일 케틀러 신부는 마인츠 주교로 서품되었다. 마인츠교구에 부임한 그는 프로이센 정부가 폐쇄했던 신학교를 다시 열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수도회 창설을 꿈꾸었다. 그리고 교회가 당면하고 있던 노동문제 해결에 직접 뛰어들었다. 노동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되자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케틀러 주교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유물론에 맞서 그리스도교적 원리에 따라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가톨릭 교리에 따라 모든 사안을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케틀러 주교는 논평인 ‘자유, 권위 그리고 교회’(1862)와 저서 ‘노동자 문제와 그리스도교’(1864) 를 발간했다. 주교직을 수행하는 27년 동안 92개의 사목서한과 소책자, 논평, 신문 기고문 등을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큰 호응을 받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케틀러 주교가 제안했던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휴일보장 등의 영향을 받아 1891년 근대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반포하게 되었다.
케틀러 주교는 1877년 교황 비오 9세의 금경축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마인츠로 돌아오는 길에 첫 미사를 집전했던 바이에른의 ‘알퇴팅 성모성지’에서 생애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이후 케틀러 주교는 오랜 친구 브루노 수사를 방문하기 위해 바이에른의 카푸친 수도회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에서 로마 여행중에 얻은 병환으로 1877년 7월 13일 선종했다.
‘인간은 난관을 극복하고 정의를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존재’라는 사실을 케틀러 주교는 역설했다. 그 시대 누구도 착안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으로 당시 사회를 전망한 그는 사회개혁의 선구자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케틀러 주교의 생애와 정신은 노동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어, 독일 국민에게 ‘노동자 주교’로 알려져 있다. 현재 케틀러 주교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인권존중 등을 주창했던 립프라우엔하이드에는 케틀러 주교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강론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매년 주교가 서거한 7월 13일이 되면 노동자들의 순례 장소가 되고 있다.
마인츠 대성당 내 케틀러 주교의 묘소 앞에는 1934년 그의 서거 57주기를 맞아 가톨릭 노동자들이 제작한 ‘Ketteler-Leuchter(케틀러 촛대)’가 있으며 당시 밝힌 등불은 오늘날에도 꺼지지 않고 24시간 타오르고 있다.
1)쾰른 대주교가 교구 성직자들에게 혼종혼 자녀들의 종교교육에 관해 국가법이 아니라 교회법을 따르도록 지시한 것에 대해 정부가 대주교를 체포하여 정부전복활동 혐의로 기소하여 감금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