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수도원장이 된 플레이보이
작성자
천주섭리수녀회
작성일
2014-12-12 09:13
조회
15731
자료출처: 중앙시사매거진 2014.12.15
수도원장이 된 플레이보이
미국 특권층의 자제로 사진가 출신인 니키 브릴랜드 티베트 불교 사상 최초의 서양인 수도원장 돼
SEAN E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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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랜드는 30년 전 승려가 됐다. 1984년 뉴욕을 떠나 인도 남부 문고드의 티베트 불교 사원 안에 있는 라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2012년 그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됐다. 달라이 라마의 임명으로 2800년이 넘는 티베트 불교 역사상 최초로 서양인 수도원장이 탄생했다. 하지만 승려가 되기 전 브릴랜드는 그의 한 친구가 말한 대로 “매우 열성적인 멋쟁이”였다.
“난 늘 재킷 윗주머니에 손수건을 꼽고 다니라고 배웠다.” 서양의 플레이보이에서 동양의 수도승이 된 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든 스님’에서 브릴랜드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가르쳤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배웠을 게 분명하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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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니키는 부모가 이혼했을 때 몹시 충격을 받았다. 당시 매사추세츠주 그로튼에 살던 그는 뉴욕에 갈 때면 파크 애버뉴에 있는 할머니의 아파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최고가 되도록 가꾸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니키의 남자 형제 알렉산더가 말했다. “니키는 그 모든 것을 흡수했다.”
“다이애나는 이상주의자였다. 물질적 한계를 뛰어넘어 환상을 좇았다. 세상을 떠날 때쯤엔 온통 새하얀 교회와 백마, 흰색 강아지들의 환영을 봤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연구소의 해롤드 코다 소장이 1993년 배니티페어에 말했다. “그녀의 손자 니키가 티베트 불교 승려가 된 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진에 관심이 있었던 니키는 다이애나 브릴랜드를 할머니로 둔 덕분에 다른 많은 사진가 지망생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열다섯 살 때 할머니의 도움으로 유명 사진가 어빙 펜의 조수가 됐다. 니키는 그렇게 성장했다. 그의 가족 사진들을 살펴보면 리처드 애비던과 세실 비튼 등 유명 사진가가 찍은 작품들이 눈에 띈다.
게다가 젊은 니키는 안목이 뛰어났다. 자신이 들어선 세계에서 유행의 첨단을 추구했다. 그는 맞춤양복 재단사들의 사진을 시리즈로 찍었다. 다른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 입을 옷을 만드는 사람들의 사진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특권층의 국제적인 젊은이로서 걱정 없는 삶을 살았다. “부모님은 자신들의 삶에 푹 빠져 있었고 니키와 나는 파리에서 살았다. 니키의 생활은 파티의 연속이었다.” 알렉산더가 돌이켰다. 니키는 여자들을 쫓아다니고 자동차 경주를 했다.
하지만 브릴랜드는 그런 삶의 어느 대목에선가 재미를 잃기 시작했다. 그는 남미 자동차 여행 도중의 명상에 관한 기사를 읽은 뒤 명상 수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간 후에는 명상 지도를 받을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 때 내가 불행했는지 알고 싶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진 않았다.” 니키가 다큐멘터리에서 회상했다. “물질적 만족을 넘어선 뭔가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1977년 존 애비던(사진가 리처드 애비던의 아들)은 이 젊은 구도자에게 뉴욕 티베트 센터의 설립자인 공라 라토 린포체를 소개해줬다. 브릴랜드는 사진 작업을 할 때만큼 열심히 견습승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79년 인도에 파견됐을 때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1984년 (달라이 라마의 조언에 따라) 라토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전 브릴랜드는 속세의 재산을 더 버렸다. 존 애비던은 그가 지니고 있던 이탈리아제 구두를 전부 길거리에 내다버렸다고 회상했다. 비슷한 시기에 누군가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해 카메라를 몽땅 훔쳐갔는데 브릴랜드는 그 일을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내게 사진은 중독성을 지닌 대상이다.” 브릴랜드가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다. “사진에 대한 애정과 재능은 내가 극복해야 할 문제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면 고결한 일이지만 부자가 되거나 명예를 얻으려고 찍는다면 이기적인 일이다.” 알렉산더는 그가 떠나기 전 카메라를 한 대 주면서 사진을 계속 찍으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다음 14년 동안 브릴랜드는 주로 수도원 안에서만 살았다. 거기서 불교를 공부하면서 동료 승려들과 친분을 쌓았다. 승려 대다수가 중국의 지배를 받는 티베트 출신이었다. 티베트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곤란에 처할 수 있다. 그들의 현실은 브릴랜드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현실이 그들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어떤 승려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브릴랜드는 그들에게 표준시간대에 대해 설명하던 일을 회상했다. “ ‘지금 내가 미국에 전화를 하면 그곳은 전 날 아침이다’고 말했더니 그들은 ‘미국에 전화를 한다고?’라며 의아해했다. 그들은 시차를 이해하지 못했다.”
때로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의 주치의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어머니가 많이 아프며 2주일~2개월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브릴랜드가 뉴욕(현재 그는 여기서 1년의 절반을 지낸다)에서 전화로 내게 말했다. “그 편지가 내게 도착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난 예전에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러 가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내가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가 살아 계실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브릴랜드가 갈 때까지 살아 있었다. 다큐멘터리에는 당시 그가 승려복을 입고 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미는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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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브릴랜드는 뉴욕시 당국에 달라이 라마가 센트럴 파크에서 연설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허가는 받았지만 연설 예정일이 일요일이라 많은 청중이 모이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1만~2만 명 정도가 고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뉴욕시 공원관리소는 그날 약 6만5000명의 청중이 모인 것으로 추정했다. “그들이 모두 불교 신도는 아니었다”고 브릴랜드가 말했다. “진정한 수행자로부터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한편 라토 수도원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건물이 너무 낡아 보수와 확장이 절실히 필요했다. 브릴랜드는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기부를 약속했던 많은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브릴랜드는 수도원에서도 사진을 계속 찍어 왔는데(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미망인 마르틴 프랑크가 그곳을 방문한 후 그는 사진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그에게 그 사진들을 팔아서 기금을 마련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파리와 베를린, 로마, 나폴리, 제노아, 뉴델리, 뭄바이, 뉴욕 등지에서 사진 판매 행사를 열어 40만 달러의 기금을 모았다. 보수·확장 공사를 마무리하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사진을 팔아 수도원을 건축한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일종의 기적이다.” 브릴랜드가 말했다. 그의 예술이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게 되자 과거에 그가 사진 찍기에 품었던 의혹이 사라졌다. (웹사이트에 실린 그의 사진들은 시장 풍경부터 수도원의 의식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그는 속세와 수도원, 양쪽을 다 좋아하며 수도 생활에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그는 “난 여자를 매우 좋아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하지만 속세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꼭 승려가 될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또 책임을 회피하려고 승려나 수녀가 돼서도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궁극적인 영적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